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다 칼로 (문단 편집) == 화풍 == 프리다 칼로의 작품세계는 '초현실주의'와 '멕시코'라는 두 단어로 정의할 수 있다. 프리다 칼로는 초현실주의로 분류되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픈 생활과 남편으로 인해 상처입었던 개인적인 경험을 반영했고, 유럽의 [[모더니즘]]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멕시코의 전통에 근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림의 소재가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하지만 비사실적이라는 점에서는 초현실주의 작품이다. 그러나 창의적 상상과 무의식적 표현을 추구하는 초현실주의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즉 초현실적이긴 하나, 주류 초현실주의와는 동떨어져 있다. 작가 생활을 시작한 지 12년 만인 1938년 멕시코시티대학 갤러리 그룹전을 가졌다. 이 전시에서 앙데르 브르통의 주목을 받고, [[루브르 박물관]]이 그녀의 자화상을 구입해 최초로 루브르에 입성한 중남미 여성작가가 됐다. 1939년 르누와 콜 갤러리의 멕시코전에서 [[파블로 피카소]], [[바실리 칸딘스키]], [[마르셀 뒤샹]] 등으로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로 인정 받았다. 칼로는 초기 [[산드로 보티첼리]]와 같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들에 대한 공부의 영향이 화풍에도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후에 그림은 점점 멕시코의 장식 미술, 당대에 유행하던 벽화 운동의 화풍을 따랐다. 그러한 변화는 프리다 칼로 본인이 중앙아메리카의 신화, 문명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던 점과 멕시코 전통의상을 즐겨 입었던 이유와 관련된다. 또한 그녀는 남편 디에고 리베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데, 그녀는 멕시코 고유의 상징이나 형식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이러한 관심은 그녀가 그렸던 그림들에서도 잘 나타난다. 또한 멕시코 전통적인 문화 이외에도 프리다 칼로에게 있어 멕시코는 혁명의 공간이기도 했다. 당시 멕시코의 혁명적인 정치 상황은 예술 분야에 여러 운동들을 촉발시켰다. 멕시코 정부를 장악하고 있었던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는 당시 높은 문맹률로 인해 문자 교육으로 민중을 계몽하고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녀는 이미지를 이용한 대중 교화, 계몽 정책을 제시하게 된다. 그리하여 디에고 리베라와 같은 당대의 화가들에게 벽화 작업을 지시하게 된다. 벽화 운동의 탄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운동의 본질적인 목적은 정치적 교화에 있었다. 하지만 벽화 운동은 미술가들에게 있어 멕시코적인 상징, 민중들의 이미지에 대한 탐구를 가능하게 하였다. 따라서 프리다 칼로의 경우에도 벽화운동은 정치적 내용보다는 개인적이고 멕시코의 전통에 뿌리를 둔 내용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